어머니의 우산

권은정 

사당역 교차로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데 맑은 날씨임에도 우산을 짚고 천천히 건널목을 건너시는 한 어르신이 차창 밖으로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백수(百壽) 가까운 연세에도 마을버스를 타고 유일한 바깥 생활인 수요예배를 매주 거르지 않으시던 어머님 모습이 겹친다. 건강체질에 부지런하신 생활습관, 소식과 절제로 건강을 잘 유지하셔서 일상생활을 잘 하시던 어머니는 언젠가부터 보랏빛 우산을 지팡이 삼아 다니셨다. 우리가 ‘어머니~ 오늘 비 소식이 있어요?’하고 여쭈면, ‘얘는, 무슨 비…. ’ 하시며 맑은 날에도 예의 그 우산을 챙겨 길을 나서신다. 식구들 생일과 기념일은 당연하고 교회의 박 권사님 손녀 태어난 날, 최 집사님네 큰아들 군대 간 날까지 다 대시던 명민하셨던 어머니. 하지만 시간이 흘러 힘이 부치시니 지팡이에 의지하며 걷게 되는 날이 왔고 청력의 약화로 외부 소리를 잘 놓치게 되면서 점점 혼자만의 세상에 머무는 일이 잦아지셨다. 어머니의 우산을 상기하며 떠오른 몇 가지 상담 관련한 화두를 나누고자 한다.

-원함

어머니께서 수요예배에 참석하시는 의미는 수요예배 이후 이어지는 교우들과의 식사와 노인대학 수업까지의 연장선이었다. 사시던 곳과 좀 떨어진 형님네와 합가하신 후, 어머니께 교회 생활은 더 중요해졌다. 예배 후 노인대학의 수업에서 배우시는 것을 얼마나 즐기시는지 특히 영어 과목의 알파벳 연습을 참 열심히도 하셨는데, 비뚤배뚤 열심히 쓰신 영어 공책을 보여주시며 자신을 자랑스러워하셨다. 또한, 당신이 원하시는바, 사회적 관계를 통해 교류하고 마음이 통하는 이들과 함께하고 싶은 내면의 욕구를 이해하시고 당신 삶에서 구현해내려 애쓰셨다. 오랜 교우들과 식사와 담소를 하여 자신을 공동체와 연결하시고 배움의 갈증을 노인대학 학습 과정을 통해 해소하셨다.

내담자들의 호소문제 중에 이러한 자기 내면의 욕구를 억압하거나 잘 표현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거나 현실의 책임이나 삶에 몰두하느라 자기의 소망이나 욕구를 잘 인식하지 못하는 예가 있다. 내담자들은 이러한 욕구의 억압이나 무시를 바로 알게 되기보다 이로부터 야기된 비효율적 사고나 삶의 형태를 보고야 도움을 구하게 된다. 내담자의 행동 양식과 삶의 이야기를 통해 초대를 받은 상담자들은 내담자의 감정, 사고방식, 소망과 기대 등을 탐색하는 과정을 그와 함께 지나며 자기를 비추어 보기도 한다. 상담자는 상담과정에서 내담자가 자신의 욕구를 알아차리고 수용하고 해소와 해결을 위해 함께 노력하며 도울 수 있다.

-받아들임

멀쩡한 지팡이 대신 우산을 지지해 보행하시는 어머니는 왜 지팡이가 아닌 우산을 고르신 걸까? 누가 봐도 우산보다 지팡이가 자연스러운 연세의 어머니인데, 어머니 자신은 그 모습을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기 그리 어려워하시는지……. 우산 드신 동기가 확실히 마음에 다가와서 뭔가 슬프기도 하고 웃고 싶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상담에 온 내담자들은 자기의 현재 삶의 정황이 싫고 힘들다고 현재 느끼는 문제 상황에 대한 자기의 해석에 고통스러워한다. 현재 불편한 상황은 과거의 상황이나 관계적 문제에서 온 것인데 그 과거는 바꿀 수 없으니 현재의 불편감이 미래에도 지속하여 유지될 거란 생각에 묶여 괴로워한다. 자기 삶에 대해 기대하고 소망하는 정해놓은 길이 있어서 현재 느껴지는 일련의 고통스러운 일들을 수용하기 어렵다고 느끼는 것 같다. 지금-여기의 내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비효율적이고 불편한 삶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타진하여 변화를 도모할 수 있는 변곡점을 찍고 새롭게 전환해 갈 수 있을 텐데 그게 참 어렵다.

-맞춤

어머니의 우산은 어찌 보면 나름의 적응적인 행동으로 이해된다. 아마도 비 온 뒤 갠 어느 날 우산을 짚고 걸으신 어머니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부적응적인 사고나 행동이 어느 시점에서는 적응을 위한 자기 보호적 조치였을 수 있으리라는 짐작에서 말이다. 다리가 힘들어 보행 시 지지할 것이 필요했지만, 자신이 지팡이가 필요한 노인이라는 사실은 자신을 힘없고 도움이 필요한 처량한 노인으로 보이게 한다는 생각을 하신 것 같다. 우산으로 지팡이를 대체하신 발상은 자존심 센 어머니께는 제법 적응적인 대처방식이라는 논리로 어머니 자신을 설득한 것으로 보였다.

상담과정에서 침묵이나 대화독점, 상담자가 다 알아서 하라는 듯한 소극적인 태도, 합리화나 지적 설명 등 다양한 방식으로 비수용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는 내담자들을 만날 수 있다. 내담자들은 이러한 행동 양식을 통해 자신을 보호했다고 느끼며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아닌 외부의 요소로 인해 생긴 어려움이라고 주변인을 탓하기도 한다. 상담자들은 내담자들의 저항과 방어를 만나면 상담이 어렵고 진행이 잘 안 된다고들 여길 수 있는데 오히려 이 장애물이야말로 내담자의 두려움, 기대와 가치 등을 짐작할 수 있는 고리이기도 하다. 상담자는 내담자가 그러한 자기의 모습을 알아차리고 긍정적인 상담 관계로 이어가도록 믿고 기다려주어야 할 것이다.

잘 맞게 적응하는 이가 생존한다는 진화론의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 논리 위에 최근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survival of the friendliest, Brian Hare and Vanessa Woods)’라는 새로운 주장을 대했다. 저자는 인간이 다정함과 친화력과 같은 사회적 유대를 통해 생존하고 적응해 왔다고 말한다. 뉴스에는 매일 잔인함과 혐오로 점철된 사건 사고가 넘치고 견해가 다르다고 마음을 나누고 편 가르는 식의 사회정서가 만연해 슬프다. 그래서인지 각종 매체가 다루는 심리와 생활 관련 프로그램 영향인지 마음과 내면에 관해 관심이 높아지고 상담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우리 일상에 제법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다. 우리의 상담수련 과정이 실력 신장과 기능의 발전을 넘어 협력과 소통, 공감과 연대로 관계의 가치가 확장되는 경험이 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