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칼럼>

= 적당한 온도와 적절한 무게, 말(言)의 사용법 =

박영미

오후에 상담이 취소되었는데 다음 스케줄이 있어 집에 갈 수는 없고 차를 한 잔 마시면서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센터 근처 카페로 향했다. 카페에 앉아 파란 하늘과 각양각생(各樣各色)으로 물들어가는 나무들을 창 너머로 보며, 주위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대화에 집중하게 되었다. 나는 상담을 하고 수련 수퍼바이저로 수련생을 지도하다 보니 말을 많이 하게 되면서 조심스럽고 늘 신경이 쓰인다.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이 때론 가볍기도 하고 큰 힘이 있기도 하고 차갑고 따스하게 느껴진다. 말에 온도와 무게가 실려 있어 마음에 영향을 준다. 아마도 말에 생각과 감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쏟아내는 말속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 말에 여러 가지가 달라붙게 되는데 제아무리 화려한 어휘와 화술로 말을 포장해봐야 소용없다. 말에 두려움이 담겨 있다면 공포가 엄습하고, 재미가 있다면 관심을 갖게 되고, 말 한마디에 사랑이 담겨 있다면 사람이 올 것이다. 말을 의미하는 한자 언(言)에는 묘한 뜻이 숨어있다. 두(二)번 생각한 다음에 천천히 입(口)을 열어야 비로소 말(言)이 된다는 것이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사람의 품성이 드러나고 사람의 됨됨이가 묻어있다. 격과 수준을 나타내는 한자 품(品)의 구조를 뜯어보면 입구(口)가 세 개 모여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말이 쌓이고 쌓여 한 사람의 품성이 된다는 뜻이다. 같은 말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말의 온도와 무게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행동으로 옮기기는 어렵다.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감정과 생각을 소중한 사람에게 전하려고 하는 순간, 표현의 미숙함으로 진심을 전하지 못한다면 그보다 답답하고 억울한 일도 없을 것이다. 또한 날카로운 혀를 빼들어 칼처럼 휘두르는 지적의 말은 자칫 독설(毒舌)로 변질될 수 있으니 나름의 기술이 필요하다. 말이라는 흉기에 찔린 상처는 깊어서 좀처럼 아물지 않는데, 말로 생긴 상처가 잘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로의 표현은 숙성된 언어를 적정한 온도로 전달할 때 효과가 나타난다. 짧은 생각과 섣부른 말로 건네는 위로는 부작용을 낳는다. 특히 상대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하는 위로는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한다. 상대의 감정을 천천히 느낀 다음 그 아픈 마음을 달래 줄 따뜻한 말을 조금 느리게 꺼내도 괜찮을 거 같다.  

경북 예천군에 언총(言塚)이라는 ‘말 무덤’이 있다고 한다.

달리는 말의 무덤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말을 파묻는 고분이다. 왜 말을 묻어야 했을까?

언총은 한마디로 침묵의 상징이다. 마을이 흉흉한 일에 휩싸일 때마다 여러 문중 사람이 언총에 모여 “기분 나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으로 시작하는 쓸데없는 말과 “그쪽 걱정돼서 하는 얘기인데요...”처럼 이웃을 함부로 비난하는 말을 한데 모아 구덩이에 파묻었다. 말 장례를 치른 셈인데, 그러면 신기하게도 다툼질과 언쟁이 수그러들었다고 한다.

일상생활에서 상담 장면에서 뱉은 말들을 합리화하기 위해 거짓말을 보태게 되고 상대방의 말보다 내 말이 중요하다고 여겨 남의 말꼬리를 잡거나 말허리를 자르고 있지는 않았는지...상담자로서 전문가랍시고, 내담자에게 섣불리 다가가서 마음대로 말로써 휘두른 건 아닌지, 내담자의 문제를 해결해주려는 전능감에 부풀어 어설픈 해석과 직면으로 오히려 상처를 주는 상담자는 아니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우린 무엇을 말하느냐에 집중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어떤 말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말하느냐가 중요하고 어떻게 말하느냐보다 때론 어떤 말을 하지 않느냐가 더 의미 있는지도 모르겠다. 말을 잘하기 위해 애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절한 때에 말을 거두어들이고 말을 삼킬 수 있는 말의 쉼이 필요하다. 침묵은 차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한 의미와 가치를 담고 있고 때로는 사람들에게 백 마디 말보다 더 무겁고 깊게 받아들여진다.

  소중한 사람의 가슴에, 

 아무 관계없는 다른 이에게, 

내담자에게 말 무덤에 묻어야 할 말을 묻고 있는 건 아닌지 헤아려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