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길을 걷다

... 어제 걸었던 길, 오늘 걸어가고 있는 길... 그리고 내일도 걸어갈 길

이 현 서

오랜만에 두터운 파카를 벗고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섰다. 지난 가을엔 온통 붉고 노란 낙엽에 빠져있던 그 길이 하얀 겨울을 지나더니 지금은 연두 빛에 물들어있다. 분명 같은 길인데...

강아지의 나이로는 중년의 아저씨가 되어버린 촐랑이 강아지와 이미 중년을 훌쩍 넘긴 내가 함께 걷다보니, 왜 이렇게 이 시간이 애틋한지 모르겠다. 며칠 사이로 한층 활짝 얼굴을 드러낸 꽃망울을 보니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듬뿍. 이렇게 꽃과 내가 서로에게 좋은 거울대상이 되어 주거니 받거니 이 봄을 즐기면서 핸드폰, 시계, 가방... 다 내려놓고 오로지 걷는 길에만 집중하다보니, 어느 순간 길과 내가 하나가 된 것 같다. 내가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것인지, 강아지가 나를 산책시키는 것인지... 그 또한 모르겠다. 하긴, 알고 모르는 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저 묵묵히 걷다보면 내가 걸어온 걸음들이 누군가 걸어갈 길이 될 수도 있으니까...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이 나이가 되어보니, 바쁘게 걸으면서 길가에 피어있는 이름 모를 작은 꽃들과 풀들을 무심코 지나쳐야만 했던 길들이 실상은 그다지 많지 않았음을. 오히려 어느 길을 가야할지 고민하면서 멈칫 멈칫하고 뒤를 돌아보느라 비틀거렸을 시간들이 아쉽기도 하지만, 또 그런 길들이 있었기에 지금 걸어가는 길들을 더 소중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매 순간 걸어가는 길은 같은 길이어도 자세히 보면 어느 하나 똑같지 않았다. 늘 내게는 처음 맞이하는 시간이었고 처음 걸어가는 길이었기에, 설레기도 하지만 넘어지지 않을까.. 저 앞에는 어떤 세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가 궁금했다. 마치 길 모퉁이를 돌아갈 때의 호기심과 약간의 불안이라 할까. 모퉁이를 돌아서 만나게 될 길들이 내가 원했던 길이 될 수도 있고, 정말 내가 피하고 싶은 길 일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그 길이 내가 걸어가야 하는 길이라는 점이다.

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가 있다. 지금은 까마득히 먼 옛날~이야기가 되었지만,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Robert Frost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가 있었다. 지금도 국어 교과서에 있으려나? 그때는 정말 훌륭한 시라고 극찬을 하던 국어 선생님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게 뭐가 그렇게 훌륭하다고...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그 누구보다도 이 시를 자주 떠올리는 중년이 되어있다. 누구나 삶의 길을 걸어오면서 두 갈래로 갈라진 길 앞에서 선택해야 하는 삶의 기로에 섰던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꼭 선택했어야만 했던 것일까? 선택하지 않을 자유는 없었을까... 선택하지 않기로 선택할 수도 있다는데. 하지만, 선택한 이상은 그냥 즐기면서 걸어가고 싶다. ‘가지 않은 길’시의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나는 한숨지으며 이야기할 거예요’ 시인이 말하는 한숨이 어떤 의미인지는 우리 모두 다 다를 것이다. 오늘 나 역시 강아지와 산책하면서 가벼운 한숨을 쉬었으니까. 아마 오늘 쉬었던 한숨과 내일 쉬게 될 한숨이 다르지 않을까... 그리고 그건 미리 알 수가 없을 것이고, 그러기에 삶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 아닐까...

내친김에 [나의 산티아고]라는 영화를 보았다. 독일의 유명한 개그맨이 앞을 향해서만 달리다가 건강에 심각한 위협을 받고 병원에서 강제 휴식을 처방받았는데, 그동안 쉼을 누려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휴식시간을 보내야 할지 모르는 게 더 불안하게 되었고, 결국 총 40일에 달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무작정 떠난다는 영화이다. 순례길 시작하는 날부터 폭우가 쏟아지고 벌레가 날아다니는 허름한 숙소에서 날밤을 새기도 하면서 주인공은 도중에 여러 번 포기하려고 하지만, 한 걸음씩 나아가며 진정한 자기를 찾아가게 된다. 영화를 보면서 인상적이었던 대사중의 하나가 ‘멈추지 않으면 도착한다’이다. 우리의 삶이 비록 힘들고 때로는 잠시 넘어져있거나 의자에 앉아 쉴 수는 있지만, 내가 멈추지만 않으면 길은 이어지겠지... 몸과 마음의 짐을 되도록 비우고, 너무 멀리 보지도 말고. 어쩌면 우리는 길 어딘가에서 잠시 멈추는 시간이 너무 없었던 것은 아닐까, 또는 너무 혼자서 오래 앉아있었던 것은 아닐까... 영화를 보는 내내 내 마음도 주인공과 같이 길을 걷고 있었다.

벌써 3월이 다 가고 4월이 오고 있다. 4월을 맞이하며 내가 나에게 물었다. 내가 잘 살고 있는거냐고... 그러게... 나도 나의 물음에 속 시원히 답해주고 싶은데, 솔직히 아직은 노답이다. 그저 지금 내가 걸어가는 길에 최선을 다할 뿐. 꽃도 있고, 돌맹이도 있고, 쉼터도 있을 것이고, 때로는 비가 오기도 할 그 길에.

2022년 수련의 길을 출발하면서 새로운 시간의 길을 걸어가는 나... 그리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걸어갈 소중한 이웃들 ... 안 해본 것은 안 해봤기 때문에 두려울 것이다. 한 번 해내면 다시 할 수 있고 그걸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니, 멈추지 말고 조금씩 천천히 걸어가다 보면, 어느 새 출발선에서 한참을 걸어온 나를 보게 되지 않을까. 더구나 우리에게는 넘어지면 손 잡아주고 지치면 잠시 쉼을 갖고 다시 걸어갈 힘을 주는 홈베이스가 있고, 무엇보다도 ‘나는 길이다’라고 하신 그분이 계시니~ 길 모퉁이 넘어 다가올 세상에 대해 호기심을 가질 수 있는 이 길이 너무 감사하다.